15일(수) 조명탑의 불이 밝혀진 목동구장. 한 점 차로 끌려가던 9회 말 투아웃 노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김민준(디지털서울문예대4.1루수)은 한 방을 노리듯 힘차게 방망이를 돌아갔다. 헛스윙.
6-5 경남대 승. 디지털서울문예대(이하 문예대)의 준결승행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다음 게임에 나서는 홍익대 선수들에게 덕아웃을 내주기 위해 주섬주섬 짐을 꾸리는 문예대 선수들 표정엔 아쉬움이 역력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인상 쓰거나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승부란 모름지기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 50%의 확률에서 그래도 내친김에 4강까지도 욕심을 낼 만 했다. 그러나 이 자리까지 왔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행복했다.
창단 12년 만에 첫 춘계리그 8강 입성
디지서울문화예술대학에 야구부가 창단 된 건 2004년. 어느 팀이나 그렇듯 한동안 선수 수급의 어려움을 겪었다. 입학하는 이들 상당수는 고교 시절 게임을 뛰지 못하고 덕아웃을 지키고 있던 무명들로 채워야 했다. 기량 면에서 뒤처진 이들로 꾸려진 만큼 1승을 챙기는 일은 항상 버겁기만 했다. 그래도 강팀도 약팀에게 덜미를 잡힐 수 있는 야구라는 스포츠의 특성상 뜻밖의 승전보를 울리는 날도 물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지속되진 못했다.
그런데 2015년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에서 문예대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A조 첫 상대 동의대에게 8-6으로 기분 좋은 출발을 했고 이틀 뒤 동아대에게 4-3 한 점 차 승. 다시 고려대에게도 3-2로 뒤지고 있던 8회 대거 4점을 뽑아 6-4 짜릿한 역전승을 챙기며 12강 토너먼트행을 확정 지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영남대(10-3), 세한대(11-9)마저 눌러 이겼다. 5전 전승 믿어지지 않는 성적으로 조 1위를 확정지었다. 대회 초반까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분위기였다. 상대가 방심하다 일격을 당한 것이라 치부하는 이도 있었고 대학 야구 평준화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나 연거푸 승수를 쌓아가자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단번에 달라졌다. 결과 뿐 만 아니라 게임을 풀어가는 과정이나 내용면에서 결코 여느 팀에게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빠른 발과 완벽한 작전 수행 능력을 발산하며 기동력 있는 플레이를 펼쳤다. 사실 이번 예선에서 몇 차례 결정적인 행운이 뒤따랐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고 상대의 실책을 비집고 들어가 흐름을 바꾼 것이 연승을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상황 하나하나를 따지면 행운이 기회를 만들어 줬고 그 기회를 잘 활용한 결과다. 운도 실력이고 우연도 겹치면 필연이 된다.
기동력까지 갖춘 타선, 전승의 원동력
“고대 이긴 이후 저희는 완전 축제 분위기에요. 타자들이 찬스 때 마다 잘 쳐주고 수비도 받쳐주니 힘이 날 수 밖에요. 정말 우리 팀이 너무 자랑스러워요.”
염진우(4학년.좌완)은 조 예선 전 경기 등판 4승(16.2이닝)을 따냈다. 평균자책점은 5.63으로 높은 편이었지만 타자들 덕분에 승수를 챙길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그가 등판하면 타자들이 경기를 뒤집었다. 함께 나눠 던진 김세중(3학년.우완),김기쁨(3학년.우완)에 비해 확실히 승운이 따랐다.
염진우- 김기쁨-김세중(왼쪽부터 위,아래 순) |
예선 5경기에서 팀 평균 방어율 4.70 타 팀에 비해 낮은 편은 아니었다. 대신 팀 타율이 3할 7푼 5리(168타수 63안타), 장타율 4할9푼 4리로 평균 10개 이상의 안타로 6.5점을 뽑아냈다. 야구는 투수싸움이다. 든든한 마운드 자원이 지원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승리 공식은 간단명료하다. 어떻게든 살아나가는 것이 첫 번째, 그 다음은 베이스를 훔치고 작전에 따라 임무를 수행해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문예대 타자들은 상대 배터리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베이스를 공략했고 집중력이 떨어진 투수의 볼을 빠르고 간결한 스윙으로 가볍게 안타를 만들어냈다. 전체 타선이 마법에라도 걸린 듯 호쾌한 방망이를 앞을 다퉈 뽐냈다.
이기는 게임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덕아웃 분위기도 최고조! |
주장이자 톱타자 김성훈(4학년.유격수)은 5경기에서 23타수 12안타 5할 2푼 2리 1타점 7도루를 기록하며 공격의 선봉에 섰다. 2번 김향길(4학년. 2루수)도 이에 뒤질 세라 5할6푼 3리(16타수 9안타) 2타점 3도루를 기록하며 중간 연결 고리 역할 그 이상을 해냈다. 3번 김정한(4학년.3루수)은 타율 4할 5푼(20타수 9안타) 6타점 3도루, 4번 김민준(4학년.1루수)도 3할8푼 9리(18타수 7안타) 7타점을 기록했다.
김대훈-김성훈 |
주장 김성훈의 친동생 김대훈(3학년.우익수) 5번 타자로 나서며 4할 9리(22타수 9안타) 6타점의 맹타를 휘둘렀다. 하위타순에 배치 된 김종규(2학년.지명),홍성경(1학년.중견수),최수범(2학년.포수),박찬수(3학년.외야수)의 활약도 빛났다. 기동력도 뛰어났다. 5경기에서 총 19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득점과 연결시키는 응집력을 보여주었다. “오늘도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길 수 있도록 마음껏 너희들의 기량을 펼쳐라 ” 배현석(디지털서울문예대)감독이 시합 직전 선수들에게 외치는 주문이다. 여느 지도자들과 좀 다르다. ‘집중하자’ 혹은 ‘필승’을 다짐하는 것이 흔한 일인데 ‘추억’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이 처음엔 무척 신선하고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니 가슴이 아려왔다. 그라운드를 누비는 것, 유니폼을 입고 뛴다는 것 그 자체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말이다. 배현석 감독은 창단 첫 해 코치로 출발, 2012년 감독에 부임 올해로 4년 째 문예대를 이끌고 있다. 예선 마지막마저 역전승을 거두자 입가엔 환한 미소를 머금었지만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배현석 감독 |
“오늘은 부담 없는 경기라 뛰지 못한 선수들도 내보내고 여유를 부렸는데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시소게임이 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기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군요. 조 1위는 정해졌어도 최선을 다하네요. 우리 선수들 이기는 맛에 단단히 빠진 거 같아요(웃음)”
춘계리그는 최소 4경기 이상의 조 예선을 치른 뒤 그 성적을 토대로 12강 토너먼트 진출 팀을 가리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대진에 따라 달랑 한 경기만으로 조기 타락 될 여지가 많은 하위권 팀들에겐 고마운 대회. 선수층이 두텁지 않거나 특히 마운드가 약할 경우는 긴 일정을 버티기 힘들다. 춘계리그와 하계리그 두 대회의 승자야 말로 진정한 대학야구의 챔피언이라고 할 수 있다.
“동계기간 열심히 해 줘서 기대를 좀 하긴 했는데 이 정도 일 줄은 저도 몰랐어요. 첫 경기부터 하고자 선수들이 하고자 하는 열망이 느껴졌어요. 저희 같은 하위권도 가끔은 이기기도 하고 그래야죠. 스포츠 아닙니까? 성적을 내야 좋은 선수들도 들어오고 그래야 팀도 강해지고...”
각양각색 아웃사이더 집합소
문예대 선수들은 남다른 사연을 가슴에 품고 온 경우가 많다. 운동을 접으려 했던 이들이 대부분. 하지만 포기하지 못하고 이 자리까지 온 것이다. 2년제에서 편입을 오는 경우도 있다. 김정한(4학년.3루수)은 배재고 출신으로 제주산업대를 졸업한 뒤 지난해 3학년으로 편입해 중심타선에서 뛰고 있다.
“처음엔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죠. 그래도 기회를 좀 더 이어가자는 생각에 결정했어요. 4학년이라는 부담감도 크지만 그래도 팀이 잘 되니까 정말 좋네요. 야구를 한 이래 이렇게 연승을 해 본 건 처음이거든요.”
김세중(3학년.우완)도 경기고-제주관광대를 거쳐 이 자리까지 왔다.
“2년제와 비교하면 실력 차가 큰 거 같아요. 춘계리그 2부에서 뛰다 여기에 와보니 저도 모르게 실력이 느는 것 같아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실력 키워 프로에도 가보고 싶어요.”
김향길 -김민준 |
최근 대학 야구계에서는 군대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팀에 복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김향길. 김민준도 그런 케이스다. “남들보다 체력만큼은 자신 있다 자부했는데 군대는 역시 군대더군요(웃음) 정찰대에 배치를 받아 2년간 산만 타다 왔어요. 덕분에 하체훈련은 원 없이 했죠.” 효천고 출신으로 3학년까지 뛰다 2년 공백 후 올해 팀에 합류한 김향길은 다부진 체격(177cm 75kg)으로 2루를 책임지고 있다. “(진)명호,(채)은성이가 효천고 동기에요. 제가 늦어도 한참 늦었죠(웃음).그래도 군필이라는 점을 어필해서 프로에 도전해 봐야죠.” 지난해 넥센의 육성선수로 프로에 입단한 허정협(넥센.외야수)과 비슷한 체격 조건을 지닌 김민준도 해병대를 전역하고 팀 내 4번 타자로 뛰고 있다. “정협이 형은 우리들 사이에선 롤모델이죠. 지명 될 줄 알았는데...그래도 잘하고 있다고 하니 곧 좋은 소식 있을 거라 믿습니다.”
왼쪽부터 김종규-최수범-김종민 |
이 밖에도 야구를 관두고 일반인으로 지내다 결국 다시 유니폼을 입은 김종민(2학년.내야수), 중3이라는 늦은 나이에 운동을 시작해 기량면에서 부족한 것 같다는 이재권(2학년.외야수). 다들 가슴 한 구석 야구를 향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주장 김성훈은 4년 전 미지명의 아픔을 경험했다. 청원고 재학 당시 그는 빠른 발과 맞추는 재주를 선보이며 유망주로 분류됐다. 그러나 작은 키(175cm)와 왜소한 체격이 걸림돌이 되어 문예대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팀 성적이 워낙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었어요. 그 덕분에 동생이랑 대학에서까지 같이 야구를 하고 있잖아요. 그땐 속상했는데 지금은 다 운명이다 싶어요.”
유격수로 뛰고 있는 형에 비해 체격이 다부진 김대훈은 작년 타율 4할 8푼 2홈런 7타점을 기록하는 등 수비와 빠른 발이 주무기인 형에 비하면 그는 방망이에 빼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다.
“형과 같이 지내니까 좋죠. 조언도 많이 해주고 올해 지명회의에서는 형이 꼭 지명 됐으면 좋겠어요. 진짜 야구 잘하는데....”
경남대의 벽을 넘어야 했던 진짜 이유
4월 15일. 앞선 두 게임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4시가 조금 넘어 시작된 경남과의 8강전.
선공에 나선 경남대는 염진우를 상대로 1회 2개의 가볍게 2개의 안타로 2점을 먼저 냈다. 그러나 문예대도 안타 한 개와 볼넷2개에 이어 폭투로 한 점, 이어 연속 3안타와 희생 플라이로 단숨에 석 점을 추가 4-2로 경기를 뒤집었다. 비로 인해 하루 순연된 터라 감을 잃지 않을까 했던 타선의 집중력은 여전했다. 하지만 마운드가 문제였다. 2회부터 3이닝 연속 실점. 경기는 다시 경남대의 흐름으로 바뀌었고 7회 김대훈의 투수앞 내야 안타로 한 점을 만회했을 뿐 6-5 아쉬운 한 점 차 패배로 끝이 났다.
경남대와의 경기를 심각하게 지켜보고 있는 문예대 선수들 |
염진우는 3.1이닝 동안 6피안타 4사사구 3탈삼진 6실점(4자책)으로 부진했다. 그 뒤를 받쳐 던진 김세중은 5.2이닝 동안 4피안타 1볼넷 4탈삼진 무실점의 호투를 펼쳤으나 팀의 패배로 빛이 바랬다.잘 맞은 타구가 수비수에게 막히고 찬스 때 친 타구가 파울 플라이로 잡히는 등 게임이 잘 풀리지 않는 날이었다. “(염)진우가 에이스니 그래도 믿고 맡긴 거죠. 어쩔 수 없죠. 4강까지만 갔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배감독은 추가점을 내주기 전 과감히 투수교체를 했어야 했는데 주저주저 하다 타이밍을 놓친 것이 패인이라고 밝혔다.
경남대전 종료 후 |
우승도 아닌 4강. 그들의 목표는 소박했다. 대회 참가 전 12강을 꿈꿨던 것을 상기하면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하필 왜 4강이었을까? 전승을 거두며 8강 진입을 확정짓자 대학에서는 그들의 다음 해 등록금을 50% 감면해주기로 했고 만약 4강까지 가면 선수 전원 등록금을 면제해주겠노라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저희야 4학년이니까 혜택을 볼 일은 없지만 후배들에겐 좋은 일이죠. 경제사정이 어려운 애들이 정말 많거든요. 꼭 이겨야 했었는데...” 우리 나이로 27살 하지만 후배들 보다 오히려 더 열심히 뛰고 달렸던 김향길은 후배들에게 큰 선물을 안겨주지 못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왼쪽 부터 김향길-김민준-김정한 |
그래도 절반 등록금을 확보한 디지털 서울 문예대 선수들. 돈도 돈이지만 자신들의 선전과 노고를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뿌듯함은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들만의 축제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14일간 그들이 보여준 건 기적도 아니고 반란도 아닌 하면 된다. 꿈은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경기를 마치고 목동구장 복도를 나서는 선수들의 뒷모습에서 희망을 찾는다. 이것이 끝이 아닌 시작이 될 수 있길 바라며 말이다.
* 디지털서울문예대를 물리치고 4강에 오른 경남대는 강호 홍익대를 7-3으로 꺾고 결승전에 진출, 건국대를 이기고 올라온 인하대와 17일 오후 2시 결승전을 치릅니다.